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팻 라일리 (문단 편집) === 선수 시절 === [[파일:external/www.latimes.com/pat_riley.jpg]] [[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|LA 레이커스]] 시절의 모습. ~~누구세요?~~ 1945년 뉴욕 주 로마에서 마이너리그 야구선수이던 아버지 레온 라일리(1906~1970)와 어머니 메리 로살리아 발로가(1909~2006) 슬하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. 아버지 레온은 [[네브래스카]] 주 프린스턴 출신이며 마이너리그 선수 때 [[오마하]]에서 살다가, 1940년대 초반 뉴욕 주 로마로 이사갔다. 청소년기 시절 린튼 고등학교에 재학하며 월트 피빌로(Walt Przybylo) 감독 밑에서 농구 수업을 받아 1961년 12월에는 [[카림 압둘자바|루 앨신더]]의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와 붙어 74-68로 이겼고, 1963년 [[켄터키 대학교]]로 진학한 후 명장 아돌프 럽(1901~1977) 감독의 지도 하에 더욱 실력을 갈고 닦아 1966년에 1년 후배 루이 댐피어[* 1944년 인디애나의 주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사우스포트 고등학교에서 뛰면서 주 내에 명성을 떨쳤고, 1967 NBA 드래프트 때 4라운드 38번으로 신시내티 로열스에 뽑혔으나 동년도에 생긴 ABA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켄터키 콜로넬스로 지명된 후 1976년 NBA 합병 시까지 9년 동안 이 팀에서 뛰었다. 합병 후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떠났으나 1979년에 방출됐고, 나중에는 덴버 너기츠에서 코치로 일한 바 있다. 2015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.] 등 나머지 백인 선수 4명과 함께 스타팅 멤버로서 NCAA 전국대회 파이널에 진출, 스타팅 멤버 5명 전원이 흑인인 텍사스 웨스턴 대학(현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, 이하 UTEP)을 상대로 맞붙었지만, 결국 패했다. 이 사실은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제작한 농구 영화 <글로리 로드(2005)>에도 잘 나와 있다. 1967년, 대학 3학년때 NBA 드래프트에 신청, 1라운드 7번으로 샌디에이고 로키츠에 지명되었고, 이곳을 필두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-피닉스 선즈를 거치며 9년동안 선수생활을 했으나, 1972년 NBA 파이널 우승에 공헌한 것을 빼고 선수생활 내내 좋은 선수가 되지는 못했다. 사실 60~70년대에 NBA에서 커리어를 아홉 시즌이나 이어갈 정도면 주전급 선수가 아니었던것 치고는 상당히 장수한 축에 들어간다고 볼 수는 있는데, 커리어 평균 출전시간은 16분 언저리에 불과하니 여러모로 얇고 길게 활약한 셈. 고교 시절엔 [[카림 압둘자바]](당시 루 앨신더)의 파워메모리얼 고교와 접전 끝에 팀을 승리로 이끌고, 대학 시절엔 남동부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등 전도유망한 선수였다.[* 위에 언급된 글로리 로드에도 "올아메리칸 선수인 팻 라일리를 어떻게 막을거냐?"고 주인공에게 기자의 질문이 들어온다. 실제로 팀의 주축이었고.] 이를 바탕으로 1라운드 7순위란 꽤 높은 순위에 지명되기도... 그러나 다재다능한 포워드였던 라일리는 키가 193cm에 불과해 NBA 급 포워드 신장에 미달했고, 때문에 프로에서는 주 포지션을 슈팅가드로 변경하였으나[* NCAA는 전체적으로 신장이 비교적 작아 프로 데뷔할 때 한 포지션 정도 바꾸는 경우가 많다. (센터면 파워포워드, 스몰포워드면 슈팅가드 등) 실제로 [[엘튼 브랜드]]나 [[카를로스 부저]]는 대학시절 내내 센터였으나 성공적으로 파워포워즈 전향을 이뤄내 프로에서 올스타급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.] 한계가 있었다. 애매한 체격, 떨어지는 운동능력, 특출난 한가지 보다는 다재다능한 툴 등은 상위무대에서 무색무취에 가깝게 전락해버리는 쉬운 조건들인데, 라일리는 이에 정확히 부합하는 타입이었던 셈. 사실 팻 라일리가 67년 드래프티란 걸 감안하면 193cm/93kg란 체격은 그렇게까지 작은 것은 아니었다. 58년 데뷔해 60년대 후반까지 리그 최강급 스몰포워드였던 엘진 베일러는 196cm/102kg이었고, 라일리와 같은 백인인데다 62년에 데뷔해 7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존 하블리첵은 196cm/92kg이었다. 그러나 라일리는 이들과 달리[* 탱크같은 몸에 NBA최초의 고공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베일러는 말할 것도 없고, 'Hondo'란 별명이 붙은 존 하블리첵 역시 당시 선수들 중에선 상당히 뛰어난 운동능력을 지니고 있었다. NBA보다 변화가 느렸던 NCAA에서도 70년대 이후 흑인선수들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, 라일리 수준의 운동능력이면 반 세대만 뒤에 태어났어도 대학에서도 슈퍼스타로 군림하긴 힘들었을 것이다.] 개인기량이나 운동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기에 프로무대에서는 한계가 있었던 것. 어찌보면 전형적인 대학스타라고 볼 수 있는데, 대학리그에서는 개인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없이도 조직력으로 강호로 군림하는 팀들이 존재한다. 특히 5, 60년대 NCAA는 더더욱 그랬는데, 당시 NCAA는 NBA보다도 흑인선수들에게 더욱 배타적이었기 때문이다. [* 위에 언급된 엘진 베일러만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요대학교로부터 스카우팅을 못 받았고, 명문과 거리가 먼 아이다호 대학에 풋볼 장학금 받고 들어가 농구선수로 뛰었다. 이때 시즌 평균 31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활약을 했음에도 1년 만에 학교 규정이 바뀌며 장학금을 못 받게 되었고, 이후 1년간 아마추어 팀에서 뛰었다가 시애틀 대학으로 전학가 2년을 더 뛰고 NBA에 들어오게 된다. 빌 러셀도 고등학교 졸업 시 스카우팅을 거의 못 받았을 정도. 다만 윌트 체임벌린같은 경우 워낙 재능이 미쳤기 때문에 UCLA같은 명문대도 줄을 서서 구애를 했고 마찬가지로 주요 대학인 캔자스 대학에 가게 된다.] 이러다보니 라일리처럼 전술이해력과 기술이 뛰어나지만 운동능력은 처지는 선수들이 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다. 라일리는 대학시절 3년(당시 1학년은 정식경기 출전못함) 36.7분을 뛰며 18.3점 8.4리바운드 2어시스트에 야투율 46.9%를 기록했는데, 특히 미국 농구기자협회(USBWA) 선정 올아메리칸 퍼스트팀, AP, UPI 선정 써드팀에 오르고 AP로부터 SEC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 65-66시즌 당시엔 원투펀치를 형성한 루이 댐피어와 함께 평균 22점 8.9리바운드로 팀내 득점과 리바운드 1위였다.(그 다음 시즌은 댐피어가 1위, 라일리가 2위) 66년 켄터키는 시즌이 마무리될 당시 AP 파워랭킹에서 1위로 선정될만큼 강팀이었고[* 이 시즌 1위에 가장 많이 오른 팀은 듀크대였으나, 마지막 5주간 연속으로 켄터키가 1위에 올랐다.], 실제로 결승에 올라 당시 무명대였던 텍사스 웨스턴을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. 켄터키 대학은 강력한 원투펀치인 라일리와 댐피어를 필두로 한 고른 전력의 강팀이었고, 누구 한명의 개인기량에 의존하지 않는 뛰어난 팀워크를 자랑했다. 세트오펜스와 기본기, 철저한 규율과 높은 연습강도는 무려 41년간 켄터키대를 감독하며 NCAA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꼽히는 아돌프 럽 감독의 철학이기도 했다. 그러나 선수들의 개인기량이 뛰어난 NBA는 전혀 달랐고, 특히 60~70년대로 넘어가면서 흑인선수들의 비중은 예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. 이런 상황이니 철저하게 짜여진 시스템 안에서 뛰는데 익숙한 반면 개인기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라일리는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